
‘당구여제’의 조심스러운 예언이 점점 현실로 굳어지는 모습이다.
김가영(하나카드)의 입에서 언급됐던 이름, 박정현(하림)이 마침내 프로당구 무대에서 첫 승리를 거둔 데 이어 승전고를 올리고 있다. 이제 스승과 제자의 서사가, 새로운 무대 위에서 본격적인 챕터를 써내려가고 있다.
“저와의 인연 때문에 언급이 다소 조심스럽지만, (박)정현이 잘 할 거에요.”
지난달 30일, 팀리그 1라운드 우승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가영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이번 시즌 활약이 기대되는 신입급 팀리그 선수’를 묻는 질문에 내놓은 답이었다. 묵직한 신뢰가 묻어나는 말이었다.
올 시즌 PBA 팀리그 개막을 앞두고 열린 미디어데이에서도 김가영은 같은 이름을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기대와 함께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며칠 뒤, 팀리그가 아닌 개인투어에서 제자는 스승의 기대에 단단히 부응했다.
박정현은 지난 3일, 프로당구 2025-26시즌 개인투어 3차전 ‘올바른 생활카드 NH농협카드 채리티 챔피언십’ LPBA 예선 1차(PPQ)에서, 풍부한 경험을 지닌 강자 이유주를 25:12로 꺾었다.
단 16이닝 만에 25점을 모두 올린 박정현의 애버리지는 1.563. 그야말로 화려한 프로 데뷔승이었다.
스승과 제자, 포켓볼부터 프로당구 무대까지
우리에게 김가영은 ‘당구여제’이지만, 박정현에게 그는 ‘당구 선생님’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포켓볼 큐를 함께 들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스승은 2019년 PBA 출범과 함께 프로무대에 먼저 뛰어들었고, 지금은 무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록 종목은 서로 달라졌지만, 두 사람은 인연을 이어가며 SNS 등에서 서로의 친분을 종종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제자가 같은 무대에 발을 디뎠다. 바로 이번 2025-26시즌 프로당구 LPBA 무대다.
대한당구연맹 여자 3쿠션 랭킹 1~2위를 다투며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했던 박정현. 그가 드디어 프로당구 무대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데뷔 후 승리는 쉽지 않았다. 시즌 개막전(우리금융캐피탈 챔피언십) 예선 1차(PPQ)에서는 상대의 불참으로 부전승을 거뒀고, 예선 2차(PQ)에서는 김보름에게 21:19로 아쉽게 패했다.
이어 열린 시즌 2차전(하나카드 챔피언십)에서는 중상위권 랭커 김경자를 만나 25:15로 완패하며, 프로의 쓴맛을 실감해야 했다.
그리고 맞이한 시즌 3차전. 박정현은 마침내 값진 한 걸음을 내디뎠다. 고대하던 진정한 프로당구 무대 데뷔승을 거둔 것이다.
“가영쌤이, 따라하지 말고, 저를 먼저 찾으래요”
“혹자들은 ‘김가영처럼 쳐라’고 말해요.”
프로무대 데뷔전에서 부전승을 거둔 직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현은 이렇게 말했다.
이어 “정작 김가영 선수님은 저에게 ‘누굴 따라하지 말고, 너 자신을 먼저 알아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네 장점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요”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초보 프로선수였던 자신에게 큰 울림이 됐고, 이제 그는 적응기를 지나 프로무대 정착기의 문턱에 서 있다. 어쩌면 우러러만 보던 ‘가영쌤'(박정현이 김가영을 부르는 호칭)의 아성에 아주 조금 발끝을 디뎠는지도 모른다.
프로무대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의 미소를 지은 박정현은, 이번 3차전서 32강전까지 미소를 이어간다.
예선 2차(PQ)에선 정예진을 25:13으로 꺾었다. 이어진 64강전에선 상대선수인 차유람(휴온스)이 감기몸살 여파로 기권하는 행운이 깃들며, 32강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제 박정현은 스승이 먼저 밟아온 길 위에 자신만의 발자국을 남기려 한다. 그 걸음은 이번 투어에서 어디까지 이어질까.
[이상연 기자/큐스포츠뉴스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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