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세트부터 꼬였고, 뭐 한 줄도 모르고 경기가 끝나버렸네요.”
올해 만 64세. ‘똘이장군’ 김정규가 17일 프로당구 1부투어 데뷔전을 치르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입술은 쓴웃음을 머금었지만, 눈빛만큼은 다시 전장을 준비하는 베테랑의 그것이었다.
김정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 3쿠션계를 대표하던 톱랭커였다. 2009년, 50을 바라보던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고, 이후엔 국가대표팀 코치로 국제 무대를 누비기도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지난해 12월, 그는 2024-25시즌 프로당구 PBA 드림투어(2부) 5차전을 통해 15년 만에 전격적으로 복귀했다. 그야말로 ‘깜짝 복귀’였다. 그리고 올해 4월 큐스쿨을 통과하며 단 5개월 만에 1부투어 무대를 밟게 됐다. 이른바 ‘초고속 승격’. 당구팬들 사이에서 ‘왕년의 똘이장군이 컴백했다’는 말이 오갔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똘이장군’의 1부 데뷔전 상대는 이번 개막전 결승진출자인 스페인의 전설, 다니엘 산체스였다.
한때 세계 4대천왕으로 불렸던 그도 이제는 프로 무대에서 다소의 부침을 겪곤 했지만, 여전히 강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김정규와는 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 그 친숙함이 이날 경기에서는 독이 됐다.
“편안했어요.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마음이 풀어져 버렸죠.”
경기 결과는 완패였다. 세트스코어 0:3 패배. 점수는 1세트 1:15, 2세트 4:15, 3세트 3:15. 산체스는 애버리지 3.000을 기록하며 45점을 모두 거둬들이는 동안, 김정규는 3개 세트 토탈 총 8득점에 그쳤다. 타임파울도 범했다.
“산체스도 오늘은 평소보다 덜 좋았다고 봐요. 그런데 그는 자기 리듬을 찾으려 계속 애썼고, 저는… 내가 나를 찾아야 했는데 그게 안 됐어요. 그렇게 경기를 끝내버린 거죠.”
경기를 복기해보면, 1세트부터 모든 것이 꼬였다. 테이블 등 환경을 파악해 날린 샷이, 번번히 예상치를 벗어나 다른 쪽에 꽂혔다. 그러면서 집중력도 흔들렸다. 사실, “멘탈이 붕괴됐는지…”라며 몰입할 틈 조차 없이 정신없이 경기가 마무리됐다는 그다.
“나는 원래 집중력이 좋은 선수였어요. 그런데 오늘은 경기 끝나고 나서야 ‘내가 뭘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돌이켜보면, 큐스쿨을 통과한 직후부터 조금씩 해이해진 마음이 스스로도 느껴졌다고 한다. 그 불안이 이날 1부 데뷔전에서 현실이 된 꼴이다.
“이 경기가 트라우마로 남을까 봐 걱정돼요. 하지만… 더 심각하게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경기가 끝난 뒤, 한 시대를 함께한 튀르키예의 전설, 세미 사이그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김정규보다 네 살 어린 사이그너는 여전히 당구대 위에, 그것도 우뚝 잘 서 있다. 그는 김정규와 악수하고 가볍게 포옹을 하더니 곧 엄지척 한다. ‘다음엔 더 잘하실 것’이란 눈빛과 함께.

그에 앞서, 상대선수였던 산체스도 김정규를 연신 안으며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에 김정규는 포옹 및 어깨를 토닥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경기 결과를 떠나, 두 사람 모두 이 복귀전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 자리에서 김정규가 산체스를 향해 볼멘 소리를 해본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서.
“산체스, 10점도 못 내게 그렇게 잘 치면 어떻해!”
현장에 있던 통역으로부터 이 말을 전달받은 산체스는 허허 웃더니, 영어로 “나는 그(김정규)를 잘 안다. 국가대표 선수였고, 코치였다”며 상대의 자존감을 추켜세웠다.
그 말을 들은 김정규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머금던 미소를 거둬들이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8점 쳤네요. 하지만 (1부)두 번째 경기는 20점, 세 번째에서는 30~40점은 뽑아야죠.”
왕년의 한국 당구계를 호령하던 그 세포는 아직 완전히 잠들지 않았다. 그의 큐는 지금부터 다시 깨어나는 중이다. 김정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담금질에 들어갈 채비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그런 김정규를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이가 있다. 임정완 프로당구협회 경기위원장이었다. 당구계 선후배로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왔고, 현재 임 위원장이 운영중인 구장(서울 논현동 NK당구클럽)이 김정규의 훈련장이기도 하다.

‘후배’ 임정원 위원장이 ‘복귀 2막’의 칼을 예리하게 갈 채비에 나선 ‘선배’이자 베테랑을 향해, 담백하지만 묵직하게 힘을 줬다. 다음과 같은 말로,
“(김)정규 형님은 원래 승부근성이 대단한 분이에요. 그게 어디 가겠어요? 오늘은 한 방 크게 얻어맞긴 했지만, 예전 당구선수로서의 명성과 실력을 이끌었던 그 세포들, 분명 다시 깨어날 겁니다.”
[일산=이상연 기자/큐스포츠뉴스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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